옥천은 시 '향수'의 작가 정지용의 고향이다. 옥천에 간 김에 정지용 생가를 찾게 되었다.
정지용 생가야 그 시절 시골마을의 집들이 그렇듯이 초가집으로 복원되어 있었고, 방안에는 걸려 있는 그의 사진과 ‘지용유적제1호’ 표시판이 그의 생가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의 삶과 작품세계를 알고자 한다면 그 옆에 있는 문학관을 찾아야 한다.
문학관에 들어서자마자 반겨주는 그의 모형이 ‘이곳이 바로 향수의 시인, 정지용 문학관이구나’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려주었다.
그곳에서 그의 작품과 삶을 엿보다가 문학관에서조차 명쾌한 해답을 알려주지 않는 것은 바로 그의 생의 마지막 시기에 관한 것이다.
정지용 시인하면 시 ‘향수’가 교과서에 실린 것뿐만 아니라 노래로도 유명해진 사실을 누구나 다 알 것이다. 하지만 정지용 시인은 불확실한 최후 행적으로 인해 한 때 월북작가라 몰려 자신의 이름 석자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채 ‘정X용’ 시인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가족과 문인들의 오랜 노력에 의해 결국 1998년에 해금되어 그의 시 향수는 그의 이름 ‘정지용’석자를 내걸고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다.
문학관의 곳곳에서는 ‘그가 한국전쟁 직후 납북되어 처형당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글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추정’일뿐 더 이상 진척된 사실은 찾을 수 없었다.
2001년에는 북에 있는 그의 셋째아들 구인씨가 서울에 와서 형 구완씨와 여동생 구원씨와 상봉한 사실이 있었다.
그간 셋째아들 구인씨는 1950년에 아버지 행방이 묘연해 진후, 둘째형 구익씨와 함께 아버지를 찾겠다고 나섰다가 실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런 그가 남쪽에 있는 가족을 찾겠다고 상봉신청을 해서 드디어 만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정지용 시인의 마지막 행적에 대한 진실이 밝혀질 거란 기대를 하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구인씨는 상봉 자리에서 굳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2003년에는 문학평론가 박태상 씨는 그가 납북되던 중 1950년 미군의 동두천 폭격에 의해 사망했다는 자료를 공개해 폭사 가능성을 주장했다.
어쨌든 문학관을 몇 바퀴 둘러보아도 그의 ‘최후 행적’에 대한 ‘사실’은 알 수 없었다. 마치 정답이 없다는 사실을 모른 채 끝끝내 정답을 맞추기 위해 머리를 짜내고 있는 학생처럼 문학관은 나를 호기심과 집착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정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해답’을 찾고 말았다.
그의 ‘최후 행적’에 대한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바로 통일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면 그 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평화적 통일이 이뤄질 수도 있고, 그의 최후 행적에 대한 ‘사실’이 밝혀질 수도 있고, 설사 밝혀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가족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상처는 더 이상 덧나지 않고, 아물게 될 것이다.
그런데 새 정부는 지난 정부에 비해서 남북관계가 괜찮아질까? 최근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산가족 생존자의 평균 연령이 77.89세라는데, ‘사실’을 밝히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더라도 괜찮겠지만, 이들에게는 지금도 흐르는 시간이 너무도 야속하다. 아직도 우리나라엔 또 다른 정지용 가족이 너무나 많다.